제일 좋아하는 아티스트 뮤지션
https://namu.wiki/w/%EA%B9%80%ED%83%9C%EC%9B%90(%EC%9D%8C%EC%95%85%EC%9D%B8)
김태원 나무위키
영화광 김태원 특유의 색깔
된장찌개 하나로도 글을쓰는 능력인데 후각상실
3남 2녀 중 셋째로 위로 형 둘에 밑으로 여동생 둘이 있다. 과거 방송에서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가세가 기울었다는 말을 종종 했지만, 김태원의 유튜브 채널에 등장한 주변인들이 김태원의 집안이 유복했다고 증언하고 본인도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집안의 사업이 아예 망가진 지경까지는 아닌 듯하다. 부친이 발명가셨고, 그래서 자기도 음악 발명가가 된듯하다고. 또 막내 아들이라 부친이 사줄건 다 사주고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얘기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는 축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충암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짤려서, 숭실고등학교로 전학한 후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기타에 전념하였다. 여학생에게 기타를 쳐주고 싶어 2년 걸릴 기타를 1년 만에 쳐냈다고 한다.
부활의 대부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다. 다만 1집의 타이틀곡 희야 같은 경우는 김태원이 쓴 게 아니라 김태원의 친구인 작곡가 양홍섭의 작사, 작곡. 2집의 회상 III는 '마지막 콘서트'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승철이 리메이크하면서 바꾼 이름이며, 당시 김태원의 여자친구였던 아내를 위해 썼다. 가사에서 나오는 소녀가 바로 아내다. 여담이지만 가사에서 소녀가 울고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당시 김태원이 약에 취해서[6] 연주하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참고로 이 '회상 III'는 부활 2집을 녹음하던 도중 녹음실에서 이승철이 보는 앞에서 한 번에 쓰였다고 한다.
1980년대 데뷔 무렵엔 시나위, 백두산과 함께 헤비메탈 밴드로 이름을 알렸지만, 오늘날로 치면 발라드 특히 록발라드적인 기운이 좀 더 컸던 탓에 시나위, 백두산처럼 좀 더 정통 헤비메탈을 추구하던 밴드와는 엄밀히 따지면 차이가 있었다.[7] 그래도 덕분인지 대중성은 셋 중 최고였다. 부활 초기 대표곡 중 하나인 비와 당신의 이야기[8] 등에서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김태원 본인은 음악 장르에 대해 꽤 열려있는지, 훗날 라디오스타에서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이 트로트 가수로 활동한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자 굳이 생활고나 현실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트로트가 락보다 아래인 장르냐, 음악이란 큰 바다일 뿐인데 그걸 변절이라 할 수 없다."고 유현상의 편을 들어주었다. 특히나 폴 메카트니가 했던 말이라며[9]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보다 더 끔찍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뭐 어디까지나 백두산의 당시 말은 김태원이란 사람을 저격했던 것도 아니고 음악에 관해 한마디 한 것뿐이기에 별 감정은 없는 듯하다. 나란히 두 팀이 방송에 나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인 적도 있고. 그리고 감정을 떠나 그의 음악적인 철학까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회자되는 '서대문파' 기타리스트로, 간단히 말하자면 골방에 틀어박혀서 자아도취하면서 밥도 안 먹고 기타만 16시간씩 치는 기타리스트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든 후엔 14시간 자면서 꿈꾸고 나머지 시간엔 술을 마신다고 한다.[10] 부활 데뷔 전까지는 게리 무어나 지미 페이지 풍의 블루스-하드록 기타, 특히 서스테인이 많이 필요한 미드템포 애드립에 능한 것으로 유명했다.[11] 부활의 전신이 되는 The End 시절에는 이태윤 왈 일본밴드 라우드니스의 기타리스트 타카사키 아키라에 빠져서 타카사키를 내가 쫓아내버리겠다고 뻥카를 칠 정도로 한동안 헤비메탈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부활 출신의 보컬 중 가장 성공한 이승철과는 사이가 좋다고 보기도 나쁘다고 보기도 애매한 복잡한 애증의 관계를 쌓아왔다.[12] 허나 둘이 만났을때 음악적 결과물은 으레 훌륭했기에, 부활 팬들 중엔 여러 개인사들을 제쳐두고서라도 다시 한 번 이승철이 부활에 합류해 주길 바라는 케이스도 있다. 한때 김태원의 유튜브 채널의 조회수 1위 영상도 이승철과의 관계를 다룬 영상이였을 정도.[13] 사실 이승철과의 관계가 너무 영화 같아서 그렇지, 이승철 이외의 다른 보컬들도 우여곡절도 많고 오래 가지 못했다.
김태원 본인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역대 부활 보컬들을 엄청 쪼았다고 남자의 자격 아마추어 밴드 편에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문제아(?) 보컬 김성민 때문에 한창 열받아 있을 때 언급한 것으로, 전문은 멤버 김성민에게 1년 내내 걱정만 할 뿐 뭐 하나 나아지는 게 없다고 화를 내며 "오늘은 일단 참을 건데요. 끝나고 보자고. 망치기만 해봐. 다 엎을 거야. 내가 역대 부활 보컬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보여준다!"라고 씩씩대자 윤형빈과 이경규의 멘션과 자막으로 부활 보컬들에겐 인자한 국민 할매가 아니라 마귀 할멈이라고 언급한다.
특히 김태원이 돈 때문에 잘랐다고 인정한 이성욱[14], 조금 복잡한 관계였던 박완규[15], 그 외 부활 디스코그라피에나 언급되는 많은 탈퇴한 전 멤버들. 김태원의 좋게 말하면 음악적 욕심과 완벽주의[16], 나쁘게 말하면 독선과 아집 때문에 밴드 이름 그대로 음반 낼 때마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기를 반복한 그의 음악사를 그대로 말해준다. 좋은 예로 안녕을 만들 때 400%나 투자했었다. 여기서 프로란 스튜디오를 3시간 반 쓸 때를 칭한다. 보통은 한 프로나 두 프로, 아주 많아야 10프로 안에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400프로면... 진지하게 계산을 해보자면 1프로가 3시간 반이면 분으로는 210분이다. 여기에 400을 곱하면 84,000분. 한시간이 60분이니 나누기 60을 하면 1,400시간. 1,400을 하루의 기준인 24로 나누면 58.333...인데 24×58=1392다. 그러니까 안녕 하나 만드는데 무려 58일하고도 8시간을 공들인 것으로 이건 다른 멤버들이 먼저 죽어날 지경이다. 너무 무리한 녹음으로 인해 이때 이성욱이 성대결절에 걸렸다. 김기연도 괜히 녹음 과정 중에 성대결절에 걸린 것이 아니다.
보컬들과 음악적 견해 차이로 헤어질지언정 인간적으론 종종 교류하는 모양이다. 서로 아예 척을 진 걸로 많이 알고 있는 이승철과도 사실 만나면 잘 지낸다고 하며, 부활 멤버들과 함께 빈소를 지키기도 했다. 보통 팀을 탈퇴하면 특별히 교류가 없는 게 정상인데 부활 보컬들과는 1년에 한 두번은 연락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1989년 이승철이 탈퇴한 뒤엔 부활 3집이 발표되기 전 4년 동안 거의 거지 비슷하게 살았다고 한다. 대마초로 인한 수감 생활기와 겹치는 시기로, 학원 영어, 수학강사를 하던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하루 1000원씩 줬다고 한다.[17] 지금까지 쓰는 통장도 1989년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부활 1집과 2집의 히트에도 불구하고[18] 자신에게 들어온 돈은 1989년 솔로 이승철이 마지막 콘서트로 리메이크한 회상III 저작권료를 받을 때가 거의 처음이었다고 놀러와 방송에서 밝혔을 정도로 사정이 안좋았던 모양.[19] 1993년도 첫사랑을 위한 곡 사랑할수록이 들어간 3집을 쓰고 모든 자신의 상황이 뒤집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누구도 자신이 뜰 거라고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찌들어 있었고 끝내는 정신병원에 감금당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렇게 망가진 자신에게 제 발로 찾아와준 친동생같은 김재기가 있었기에 재기가 가능했다고 한다.[20]
작곡적인 능력으로 말한다면 '네버 엔딩 스토리'의 굴지의 히트 이후로는 자기복제 경향이 심해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부활 팬층도 어느덧 나이가 40대 이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팬들이 뭔가 새롭고 혁신적인 사운드를 원하는 것도 아니며, 팬이 아닌 사람들도 부활이 신선한 사운드를 들려주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 모양이다. 다르게 보면 김태원 특유의 색을 가지고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부활 앨범은 따로따로 떨어진 곡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곡이 김태원의 사랑 혹은 인생사를 모티브로 쓴 노래다. 그리고 예능 출연으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그동안 발매된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OST, 디지털 싱글 등의 퀄리티는 상당하며 이 곡들만 모아도 하나의 앨범이 완성될 정도의 분량이다.
이런 주장에 김태원은 생각보다 분명하게 자기 입장을 밝혔는데, 세상엔 많은 뮤지션이 있고, 나는 내 음악을 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다른 음악을 원한다면 다른 뮤지션을 찾는 게 정답이라는 입장이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사실 '사랑할수록', '네버 엔딩 스토리' 두 히트곡 모두 정말 김태원의 인생이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 나온 곡이다. 사실, 네버 엔딩 스토리 이후[21] 곡이 비슷하다는 의견 자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며 이는 김태원 본인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김태원의 에세이에 있는 "나는 음악이 좋았기 때문에 마약과 감옥살이, 알코올중독도 이겨내고 현재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고통이 따라야 히트곡이 나오는 거라면 더 이상 명곡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이제 어떤 스토리를, 인생의 가사를 쓰기 위해 가시밭길을 걷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라는 글에서 느껴지는 김태원의 심경 변화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2011년 남자의 자격을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라는 이름의 합창곡을 작사/작곡했다. 또 이때 같이 쓴 곡이 사랑해서 사랑해서.
SBS 힐링캠프에서 밝히길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비와 관련된 곡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이고[22], 잠 잘 때는 커튼으로 방의 창문을 막아서 어둡게 한 뒤에 스테레오사운드 오디오로 24시간 빗소리가 흘러나오는 CD를 틀어놓는다고 한다.[23]
박완규의 인터뷰에서 언급되기를, 생활고로 인한 이혼과 성대가 망가지는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비밀이라는 곡을 들고 와서 무작정 부르도록 시키면서 그의 재기를 도왔다고 한다. # 마약을 하면서 방황하던 자신을 김재기라는 인물이 도와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방황하는 후배를 도와준 셈이다. 그리고 2007년 부활과 박완규 모두 힘든 시절에 자신을 믿고 모든 걸 맡긴 것은 박완규뿐이었다고 한다.[24] 그래서인지, 이미 2009년 라디오 스타에 출연했을 때 이미 김태원은 콜라보를 하고 싶은 보컬 중 하나로 박완규를 지목하기도 했다.
대단한 영화광으로 약 1만 편 가량을 보았다고 한다. 책을 읽지 않는 만큼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한다. 예능에서 자주 고전 영화를 언급한다.
무릎팍도사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남자의 자격 탭댄스편에서는 백야를, 그리고 힐링캠프에서는 한혜진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언급하자 바로 알아차리는 모습을 보였다. 2집에서, 그리고 부활의 가장 유명한 연주곡인 'Jill's theme' 또한 거장 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OST다.
2016년 앓았던 패혈증이 재발해 후각을 잃었다고 밝혔다. 한동안 방송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유였으며, 된장찌개 냄새로도 글을 쓰던 김태원이였기에 우울증까지 앓았다고. 여름에 음식물 쓰레기 버리면서 아주 살짝 난 그 냄새에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3. 장비[편집]
뮤지션 중엔 정말로 드물게 장비에 큰 욕심이 없기로도 유명하다. 케이블TV의 모 프로그램에서 김구라가 기습적으로 그의 집에 인터뷰를 간 적이 있었는데, 집에 있는 것은 당시 엔도서 활동으로 받았던 일렉기타 하나와 통기타 하나 이렇게밖에 없었다고 한다. 좋은 기타를 선물받은 적도 많지만 후배나 지인들에게 대부분 나눠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기타를 주문 제작할땐 플로이드 로즈 브릿지와 던컨 픽업이 들어가야 하고, 일단 가벼워야 한다고 한다. 무게의 경우 체력적인 문제로 보인다.[25] 현재 메인으로 쓰는 보라색 기타는 ESP 오리지널 호라이즌 커스텀 기타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로, 한때는 공연에서는 앰프+이펙터(GT-6)하나[26] + 기타 조합으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김태원의 '복잡한 건 싫다'라는 성격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뉴럴 DSP의 하이엔드 멀티 이펙터인 쿼트 코텍스(Quad Cortex)를 사용 중이다.
폴 제페토 가니메데 김태원 시그니처도 사용하는데, 폴 제페토는 김태원 본인이 설립한 기타 제조사이며 옆에 붙은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만든 장인의 이름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와는 달리 품질은 많이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듯하다. 그래도 커스텀 오더(주문제작)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웬만한 하이엔드 기타가 부럽지 않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폴 제페토가 좋은 인지도를 얻은 이유는 은퇴한 노령 장인과 장애인을 고용하고, 수익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하는 데 있다. 이러한 사회적기업 성격에 주목한 최근의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노사문제로 논란이 된 모 업체와 비교하며 호평하는 뉴스 댓글을 볼 수 있다.
4. 연주력[편집]
김태원의 기타 연주는 특유의 서정적이면서 따뜻한 기타톤, 깊은 비브라토와 밴딩, 최대한 감정을 담은 연주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꽉 차는 감동을 주는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로 1980년대의 한국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 실력 평가의 척도는 속주와 화려한 손가락 움직임이었다.[27][28] 그러한 시대 상을 감안해서 보자면, 80년대에 김태원은 소위 '3대 기타리스트'로 함께 언급되는 신대철, 김도균과 비교해서 속주에 있어서는 다른 둘에게 그렇게 떨어질 것이 없었다. 실제로 김태원이 디 엔드와 부활의 초창기 시절에 라이브로 연주했던 단골 커버곡들은 잉베이 맘스틴의 'I'm a Viking', 반 헤일런의 'Eruption', 마이클 쉥커의 'Captain Nemo', 라우드니스의 'Like Hell' 등 상당한 테크닉을 요구한 곡들이였으며, 당장 부활 2집의 Jill's Theme만 들어봐도 수준급의 속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간혹 김태원은 그때 실력을 기준으로 봐도 둘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저평가도 있지만, '김태원이 과거에 아주 대단했다'라고 회고하는 뮤지션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당대에 예사롭지 않은 기타리스트로 인식됐음을 알수 있다.[29] 다만 기타 장인에 가까운 김도균, 신대철에 비해서 이러저러한 개인사로 인한 연습 부족과 건강 문제에 시달린 김태원이 더 빠른 노쇠화가 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30]
그리고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는 톤 메이킹이 한국에서는 가장 중요했다.[31] 90년대 기준으로 볼 때 두 기타리스트에 비하면 단조로운 면이 있었으나 김태원 고유의 톤은 굉장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특유의 톤 메이킹에 있어서는 폄하될 이유는 없다.[32]
시간이 흘러 가면서 기타 연주의 빠른 발전이 있었고 그에 따라 기타리스트들의 수준이 극도로 상향평준화된 현시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김태원의 연주 스타일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긴 하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 김태원은 부족한 연주력을 서정성과 감성으로 보완하고도 남는다. 김태원 본인이 고백했듯이, 많은 명곡을 세상에 내 놓은 그의 능력은 삶의 가시밭길을 걸어 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얻어낸 것이고 그 대가로 연주 기량의 하락 역시 따라 온 것이다. 그래서 음악인으로서의 역량을 연주력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로 현재는 기타리스트로써의 김태원 이라는 타이틀보다 작곡가/음악인의 영역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태원 본인은 본인 유튜브에서 나무위키 읽기 컨텐츠때 기타 실력에 대한 평, 즉 유명 기타리스트라거나 신대철 김도균과 함께 80년대 3대 레전드로 추앙받기에는 역량이 모자라다는 글을 보고 꽤 불쾌해하기도 했다. "이 얘기를 해서 기분이 좋으셨다면 축하드려요. 계속 평가를 하세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잘 치고 못 치고의 기준이 속주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기타라는 것은 기타리스트의 목소리와도 같은거니 그 사람이 노래를 이렇게 부르든 저렇게 부르든 다르게 부르는 것일 뿐 (일정 수준 이상이면) 우열을 가리긴 어렵지 않냐는 견해를 비췄다.
이때 읽은 버전은[33] 김태원의 나이만 고려했지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과하게 쇠했다고 평하는 잘못이 있었다. 상술된 평이 지나치게 단점만 꼬집은 혹평일 수 있다. 김태원의 기타 톤에 있어서는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고 80년대 당시에 대해 회상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건 어느 정도 기타 톤 등에 대해 투자하고 고찰할 만한 물질적 여유와 장비가 생겼던 90년대와 달리 80년대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80년대 당시 김태원의 기타 톤은 확인할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는 발전을 거듭했던 90년대 이후와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당시 기준으로 감명을 줬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김태원이 설령 나무위키 읽기 컨텐츠에서 기분 나빠했다고 하더라도 주변 측근들의 증언, 장르 매니아들의 중평으로 봐도 김태원의 방향성이 작곡가/음악인으로 기울면서 세세하게 기타 톤이나 극도로 정교한 연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34] 80년대 당시 기준으로는 독특하고 감성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은 동료 음악인들의 증언을 봐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35]
그리고 김태원의 기타 실력이 젊은 시절에 비해서 그리 발전하지 않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김태원의 연주가 감동을 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주의 목적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김태원은 자기가 만든 곡의 핵심을 잘 알고 프로로서의 연주력은 충분히 갖췄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그 연주로 충분한 감동을 줄 수 있다. 다만 세세하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작은 것 하나하나를 느끼는 매니아들에게 있어서는 멜로디나 프로듀싱 영역을 제외하면 수십년째 발전이 없는 지루한 연주일 수는 있다.
7. 주요 음악 작품[편집]
록밴드 부활과 부활(밴드)/앨범 목록, 김태원(음악인)/음악 활동 문서를 참조하자.
김태원은 프로 기타리스트로 데뷔한지 30년이 지났지만 기타 솔로 앨범을 낸 적이 없다. 부활 초기 음반인 1집과 2집에서는 속주플레이와 블루지한 연주, 클래식과 록을 접목시킨 독특한 분위기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그 이후는 기타 테크닉에 치중하거나 기타 솔로를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곡 전체 또는 그룹 전체의 사운드 완성도를 높히기 위한 기타 연주를 하였다. 솔로 기타리스트라기 보다는 밴드 기타리스트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부활은 앨범을 낼때마다 1~2곡 정도 연주곡을 넣었다. 이 연주곡을 통해 김태원의 기타 연주 스타일 변화도 느낄 수 있다.
2014년 10월 KBS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하여 뜨거운 안녕에 레드 제플린의 Kashmir과 영화 쉘부르의 우산 테마곡인 I'll Wait For You를 편곡 연주하였고, 2015년 4월 불후의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하여 홀로아리랑에 애국가를, 12월에는 노민우와 함께 출연하여 조용필의 모나리자에 잉베이 맘스틴[48]의 Icarus' Dream Suite Opus4 #를 편곡 연주하였다. 2017년 4월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하여 사랑의 의지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편곡하여 연주하였다. 김태원은 음악 대가들이 남긴 곡으로 편곡하고 멜로디를 구성해보면서 보통 본인이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 작가나 가수가 나오는건데 이들의 곡을 듣고 자란 세대로서 조건없는 선물을 받고 자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8. 음악인 가족[편집]
딸 김서현이 2013년 1월 31일 데뷔했다. 싱글 타이틀은 'Into The Skies'로 가수 본인이 작사 및 작곡한 곡. 다만 한국어 버전 가사는 작사가가 따로 있다. 딸인 김서현도 김태원의 성격을 꽤나 그대로 물려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완벽주의와 독불장군 성향이다. 그런데 김태원은 그 완벽주의로 밴드 멤버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반면, 김서현은 완벽주의를 자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평가하는 잣대로 활용해서 스스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같이 지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 중이라고 한다.
9. 저서[편집]
당신이 없는 완성작이란 없습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퍼즐에서 그대는 완결에 필요한 마지막 한 조각입니다. 전 우주에서 단 한 명의 누군가도 소외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보러가기
제목은 '우연에서 기적으로'.
약 1년에 걸친 집필을 거쳐 2011년 11월 21일에 발매된 에세이집으로 김태원이 생각날 때마다 녹음하고 친필 메모를 적어 원고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타 에세이나 자서전과 달리 김태원의 의식 내면의 흐름과도 같은 문체와 구성이 특징이다. 김태원의 오랜 지인이 삽화를 담당하였고 아들인 우현 군의 그림이 표지에 실리기도 하였다. 수익금 전액은 장애인들을 돕는 서울 가양동 천주의성요한수도회[49]에 기부된다고 한다.
마약 범죄로 인한 수감과 정신과 치료, 밴드를 하면서의 갈등을 가감 없이 서술하였고 그렇기에 대가 없이 베푼 포용과 선의가 어느날 기적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들을 담담하게 풀어내어 단순한 연예인 자서전이 아닌 에세이집으로서 평단과 기자들의 반응 또한 호의적이다.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comme au premier jour + 가사 ~ sonnet (unknown dress) (0) | 2024.08.24 |
---|---|
Oblivion, Transcript Tejerina, Arr N.Kossinskaja (0) | 2024.08.05 |